[직장인 레시피] 현재를 자각하고 행동을 자극하며, 미래를 설계하라 > 일상공유 | 아이웰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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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공유
제목 [직장인 레시피] 현재를 자각하고 행동을 자극하며, 미래를 설계하라 작성일 21-04-06 13:09
작성자 독고인라영 쪽지보내기 메일보내기 자기소개 아이디로 검색 전체게시물 조회수 1
<script type="text/javascript">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1/04/06/0004775034_001_20210406105747253.jpg?type=w647" alt="" /></span> 직장 생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아무리 소소해도 그 원칙을 지키고, 원칙이란 단 바카라사이트「〃https://diamond7casino.site〃」 어가 스스로를 각성시킨다면, 원칙을 꿈 또는 목표로 대신해도 된다. 다만 그것은 ‘나는 어떤 사람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어야 한다. 이 목표는 ‘나의 현재를 자각하고 나의 행동을 자극하며 카지노사이트「〃https://diamond7casino.site〃」 나의 미래를 설계’하는 토대가 되기 때문이다. <br><br>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1/04/ 온라인카지노카지노「〃https://diamond7casino.site〃」 06/0004775034_002_20210406105747267.jpg?type=w647" alt="" /></span> <br><br> ▶용서는 후회 없이, 인내는 굴욕 없이<br><br> 설 이후 김 선배를 만났 <a href="https://diamond7casino.site" target="_blank">바카라사이트</a> <br> 다. 김 선배는 작년 말 직장을 그만두었다. 물론 그 선택은 자의였다. 김 선배는 세칭 ‘잘나가는’ 사람이었다. S대를 졸업했고 미국 아이비리그에서 MBA를 수학한 후 국내 최고 기업에 입사하는 등 그야말로 꽃길만 <a href="https://diamond7casino.site" target="_blank">카지노사이트</a> <br> 걸었다. <br><br>동기들 중 제일 먼저 차장, 부장으로 승진했고, 상무보, 전무로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했다. 물론 선배는 일도 무지하게 했지만 보상도 두둑하게 받았다. 초고액 연봉에 스톡옵션 또한 직장인들이 평 <a href="https://diamond7casino.site" target="_blank">온라인카지노</a> <br> 생을 다녀도 만지지 못할 거액을 받았다. <br><br>김 선배는 실력뿐 아니라 인품도 훌륭해 주변에서는 사장 승진은 시간문제라고 기대했다. 하지만 선배는 50세를 넘기자 과감하게 사표를 던졌다. 당연히 회사에서는 바카라사이트「〃https://diamond7casino.site〃」 만류했지만 김 선배의 결심은 단호했다.<br><br>김 선배에게 사표를 낸 이유를 물었다. 물론 자세한 속내는 알 길이 없지만 선배는 이런 얘기를 들려주었다. “청춘을 바친 회사다. 물론 몇 계단만 더 올라가면 직장 카지노사이트「〃https://diamond7casino.site〃」 인들의 꿈인 대표도 될 수 있었겠지. 나 역시 욕심이 있었다. 하지만 내가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있다. 그것은 내가 직장 생활을 시작할 때 스스로에게 다짐한 원칙 때문이다. 그 원칙을 지키는 순간까지 회 온라인카지노카지노「〃https://diamond7casino.site〃」 사를 다니고 어느 순간 원칙이 무너지면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다짐했었다. 나름 그 원칙을 지키면서 직장 생활을 했는데 최근 들어 욕심에 지배받는 나를 발견했다. 조금 웃기는 이야기일 수도 있겠지만 그건 나에게는 한 인 <a href="https://diamond7casino.site" target="_blank">바카라사이트</a> <br> 간으로서 ‘위대한 발견’이었다. 바로 ‘내가 나답지 않아지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내가 정한 원칙은 세 가지였다. 대단한 것도 아니다. 그저 이 세상을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것들이다. 어쩌면 나를 지키는 방패일 수도 있다. 그것은 ‘용서는 후회 없이 하자’, ‘화해는 원망 없이 하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인내는 굴욕 없이 하자’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별것 아닐 수도 있지만 나는 이 세 원칙이 직장인으로서 내 자존심이었다. 그런데 전무까지 오르니 욕심이 생기더라. 욕심이 앞서는 순간, 다른 사람의 장점보다 단점이 더 보이고, 용서, 화해, 인내도 사람을 구분하면서 발휘하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때 나는 스스로 판단했다. ‘아, 나는 리더의 자격을 상실했다’고.”<br><br>김 선배의 이야기, 어쩌면 우리 같은 범인의 기준으로는 한마디로 ‘배부른 소리’ 일 수도 있다. 하지만 김 선배에게 그 원칙은 직장인으로서 20년의 시간을 지탱한 기둥이었다. 김 선배는 어느 순간, 조직은 나의 승진을 위한 서포터 부서로, 부서원은 그저 실적을 올리는 부속품으로 그리고 보스에 대해서도 ‘이건 아니다’고 생각해도 그 말을 입에 올리지 않고 그저 보스의 귀를 간질이는 달콤한 말만 기계적으로 내뱉는 자신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즉, 후회 없는 용서는 고사하고 부하 직원의 실수는 용서가 되지 않았고, 라이벌과의 화해보다는 라이벌의 단점을 파헤치는 데 혈안이 되었고, 보스에게도 충성의 인내가 아닌 그저 복종과 굴욕의 인내를 했다는 것이다. 그 순간 김 선배는 자리를 지키는 것이 회사나 부하 직원은 물론이고 스스로에게도 해가 된다고 판단했다.<br><br>그렇다. 직장 생활에서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원칙이 있다. 그것이 아무리 소소해도 그 원칙을 지키고, 원칙이란 단어가 스스로를 각성하게 만든다면, 꿈 또는 목표로 대신해도 된다. 누구는 ‘3년 안에 과장이 되겠다’일 수도 있고, 또 누구에게는 ‘보너스와 수당을 모아 영끌해서 주린이를 탈출해 한 방 승부를 보겠다’는 욕망일 수도 있다. 물론 그것들의 실현은 각자의 노력과 주어진 환경, 운도 따라야 한다. 그래도 직장 생활을 하면서 김 선배처럼 ‘고상하고 인간적 원칙’까지는 아니더라도 자신만의 원칙과 목표는 있어야 한다. 그것은 바로 ‘나는 어떤 사람으로 어떠한 과정을 거쳐 어떤 평가를 받겠다’는 것이다. 이 목표는 ‘나의 현재를 자각하고 나의 행동을 자극하며 나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br><br>나무 밑동에 달린 잎은 바람에도 잘 흔들리지 않는다. 하지만 나무 맨 위에 달린 잎은 작은 바람에도 흔들린다. 옛날 사람들은 나무 위를 보고 날씨를 판단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직장 생활에서도 나무의 윗부분을 보는 감각을 키워야 한다. <br><br>가지와 잎이 무성하게 서로 엉킨 부분은 외부의 변화에 더디기 마련이다. 그곳에 몸을 담고 아무리 귀를 쫑긋 세워도 안팎에서 일을 체감하기 어렵고, 설사 알아챈다 해도 늦다. 목표가 세워져야 각론의 방법론도, 계책도 나올 수 있다. 목표는 간단하고 확실해야 하지만 ‘3년 뒤에 과장이 되겠다’ 같은 단편적인 목표는 일단 뒤로 미뤄야 한다. 그것은 목표가 아니다. 큰 실수가 없다면 시간의 흐름이 50%쯤은 해결해 주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으로 어떤 과정을 거쳐 어떤 평가를 받겠다’는 목표를 세우는 것은 직장에서 ‘필요한 사람’이 되는 일이다. 업무 능력, 대인관계, 특별한 스킬, 인맥 등 회사에서 직원을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에서 지위와 직책에 맞는 합격점을 받는 일이다. 모든 면에서 A를 받는 것은 ‘아름다운 희망’이다. 현실은 그렇게 녹록지 않다. 그래서 직장인들은 밤낮 없이 회사와 결혼하고, 일과 연애하는 것처럼 산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이런 방법만으로는 당신의 특별함을 돋보이게 할 수 없다. 왜? 내일 사표 쓰고 나갈 사람이나 타고난 금수저를 제외하고는 모든 직장인이 다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br><br>이때 필요한 것이 있다. 같은 일을 하고도 더 돋보이는 것, 같은 보고를 하는데도 더 설득력 있는 것, 같이 모여 해결책을 찾아도 더 효율적인 제안을 하는 것이다. 직장 생활에는 리더십과 처세학이 두루 섞여야 가능하다. 그렇다고 실력은 없는데 말만 달콤하게 하거나, 간신나라 충신처럼 상사에게 예스를 연발하거나, 상사의 몸종처럼 구는 것은 ‘생존의 처절한 몸부림’이지 슬기로운 회사 생활이 아니다. 진짜는 남들이 열 번 하면 나는 백 번을 할 수 있는 ‘다름’이고, 그 어떠한 상황에서도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고 풀코스를 뛸 수 있는 ‘강인함’이다. 그래서 그 결과물을 인정받는 것이다.<br><br>위를 봐야 한다. 즉, 목표를 정확히 봐야 한다. 그저 하루하루 일수 도장 찍는 직장 생활은 나무 밑동에 엉켜 있는 평범한 나뭇잎일 뿐이다. 비록 비바람을 온몸으로 받고, 버틸 수 없는 거센 태풍에 떨어질 위험이 있더라도, 나무 위의 잎이 되어야 한다. 직장에서 변화를 판단하는 기준의 시작점은 항상 나무 맨 위에 달린 잎이기 때문이다.<br><br>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1/04/06/0004775034_003_20210406105747278.jpg?type=w647" alt="" /></span> ▶완인, 완전한 인간이 되려는 노력<br><br> 19세기 청나라의 재상 ‘증국번’. 그는 종이호랑이로 전락한 청나라 말기에 나라를, 아니 백성을 지키는 외로운 등불이었다. 그는 청렴, 성실, 인내, 관용으로 청 왕조가 아니라 백성을 섬긴, 시대의 원칙을 지킨 올바른 인간이었다.<br><br>역사가들은 중국 역사상 위대한 ‘처세의 달인’으로 네 명을 손꼽는다. 삼국시대 위나라의 조조, 전국시대 재상이며 거부 여불위, 19세기 막대한 부를 창출한 중국 재벌의 시조 호설암 그리고 청나라 말엽 정치가이자 장군, 유학자인 증국번이다. 이 중 증국번은 단순히 처세의 달인으로 치부하기에는 인품의 완성도에서 독보적인 인물이다. 그는 재상의 지위에 올랐고, 상군 민병대를 조직해 태평천국의 난, 염군의 난을 진압한 군사 전략가이면서, 시문과 경전에도 능한 유학자이며, 무너져 가는 청나라를 마지막까지 붙잡은 충신이었다. 실로 다양한 분야에서 역량을 과시한 인물이다. 더구나 증국번은 중국의 모택동과 장개석 두 사람 모두에게 각기 “근대 중국 인물 중에서 나는 오로지 증국번에게만 탄복할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과 강한 의지력의 소유자 증국번은 가히 스승으로 삼을 만하다”고 존경을 받았다.<br><br>물론 1920년대 이후 증국번은 비판을 받았다. 민중 봉기로 평가받은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봉건주의자라는 평가와 함께 만주족에 충성한 한족의 배신자라고 비난 받기도 했다. 하지만 중국인들은 증국번을 완전한 인간, 즉 ‘완인完人’이라 부르며 존경한다. 그것은 유연하고 현실적인 정책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과 함께 적재적소의 인재 등용과 후계 양성, 실용적인 제도 개혁 등은 물론이고 강인하면서도 관용을 베푼 재상이었기 때문이다.<br><br>증국번은 1811년 후난성 상향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증린서는 무려 17번의 시험 끝에 43세에 관직에 나갔다. 당시 청나라는 총 7번의 시험에 합격해야 관직에 진출할 수 있어 수십 년 공부는 비일비재했다. 증국번은 어려서부터 매일 공부만 하는 아버지, 실패에도 또 도전하는 아버지를 보면서 끈기를 배웠다. 증국번 역시 14세 때 처음 과거에 응시해 27세에 최종 합격했다. 아버지보다는 빨랐지만 증국번이 키운 후계자 이홍장이 17세, 좌종당이 14세에 급제한 것에 비하면 늦은 편이다.<br><br>증국번의 끈기를 보여 준 일화가 있다. 증국번의 집에 도둑이 들었다. 도둑은 몸을 숨기고 전부 잠들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증국번이 밤새 책을 외우지 못하고 새벽녘이 다가오자 도둑은 그만 화가 났다. 대들보에서 내려온 도둑은 증국번에게 귀동냥으로 자기가 들은 것을 읊고는 화를 내고 나가 버렸다고 한다. 증국번은 타고난 영웅이 아닌 남이 열 번 하면 백 번 하는 끈기의 인간이었다.<br><br>증국번은 한림원에서 근무하게 된다. 한림원은 황제 직속으로 인재들의 집합소였다. 10여 년을 북경에서 근무한 증국번은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과거를 통과하면 공부를 중단하는 보통의 관리들과는 달랐다. 경전을 공부해 유학자로서의 능력을 키웠다. <br><br>증국번은 병부시랑, 예부시랑으로 승진했다. 증국번은 틀에 박힌 관료 생활을 탈피하기로 마음먹는다. 그는 옛날 목에 칼이 들어와도 간언을 했던 충신, 열사들의 전기를 공부하며 그들의 행동을 본받기로 한다.<br><br>당시 청나라는 종이호랑이였다. 1842년 아편 전쟁에서 패한 후 청나라는 엄청난 배상금을 영국에 물어 주어야 했고 국부는 유출되었다. 증국번은 이를 황제에게 고했다. 한족으로 이루어진 녹영군과 만주족으로 이루어진 팔기군은 사기를 상실한 군대가 되었으며, 관리들의 부정으로 농민들은 유민이 되어 곧 민란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내용이었다. 함풍제는 사실을 왜곡하고 침소봉대한다고 증국번을 나쁘게 보았다. 하지만 관리들의 청원으로 함풍제는 노여움을 풀었다. 증국번은 이때 ‘정치란 현실적 정무 감각과 유연한 사고가 필요하다. 단지 도덕적 기준만 갖고 하는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깨달았다.<br><br> <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1/04/06/0004775034_004_20210406105747286.jpg?type=w647" alt="" /></span> ▶준비되었을 때 행동에 옮겨야 한다<br><br> 홍수전은 태평천국을 개국하고 난을 일으켰다. 태평천국의 리더 이수성은 치밀한 전략으로 남경을 점령하고 남경을 태평천국의 수도 천경이라 바꿨다. 태평천국 군은 ‘청나라, 즉 만주족을 몰아내고, 모든 백성이 함께 땅을 일구고 같이 음식을 나눠 먹고, 더구나 남자와 여자가 모두 평등한 세상을 만들자’며 북경까지 그 세를 확장했다. 청나라는 녹영군과 팔기군을 파견했지만 군대는 이미 전의를 상실했다. 이때 증국번이 나섰다. 1853년 그는 고향에서 민병대 ‘상군湘軍’을 조직했다. 이들은 태평천국 군을 물리치기 시작했다. 물론 증국번은 노련한 군 지휘관은 아니었다. 상군을 조직하고 너무 강한 훈련으로 부하들이 반발해 반란이 일어날 뻔도 했다. 또 황제는 빠른 출진을 명했지만 증국번은 듣지 않았다. 그에게는 황제의 조급한 명령보다 훈련받은 병사들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간신들은 황제에게 “증국번이 권력놀음에 빠진 것 같습니다”라며 모략을 일삼았다. 증국번은 황제의 명령을 세 번이나 거절한 끝에 준비된 상군으로 승리했다. 그는 느리지만 치밀한 준비와 계략이 우선되어야 한다는 완벽주의자였다.<br><br>1855년 제2차 아편 전쟁까지 겹치면서 중국은 온통 전란에 휘말렸다. 1864년 상군이 남경을 함락해 홍수전과 이수성을 포로를 잡았다. 태평천국 군 30만 명의 투항을 유도했지만 태평천국 군은 끝까지 저항해 모두 몰살당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6년간의 태평천국의 난은 약 2000만 명의 인명이 희생되는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1865년, 불교의 영향을 받은 백련교 비밀 결사 조직 염당이 ‘염군의 난’을 일으켰다. 이들은 주로 탈주병, 농민들이 주축으로 태평천국 군과 합세해 저항했지만, 이 역시 증국번의 상군에게 토벌 당했다.<br><br>그는 관리, 군인, 재상이기도 했지만 충과 효 그리고 의리와 도덕을 중시하는 유학자였다. 그에게 백성과 국가는 모두 지켜야 할 대상이었다. 청나라 조정은 증국번을 치하했다. 그에게 의용후 작위와 함께 태자태보, 대학사로 임명해 권력과 명예에서도 청나라 으뜸이 되었다. 하지만 황실은 근본적으로 증국번을 믿지 않았다. 그가 한족 출신이라는 것도 불신의 원인이었지만 증국번의 명성이 중원으로 퍼져 나가는 것을 경계했다. <br><br>증국번의 상군이 남경을 점령하자 청나라 조정은 녹영군과 팔기군에게 상군을 경계하게 했다. 또 흠차대신들은 증국번을 감사했다. 또한 증국번의 동생이면서 상군의 장군 증국전을 남경을 약탈하고 반란 수괴인 홍수전의 아들 홍천귀의 도주를 방조했다는 혐의로 감사했다. 결국 상군 내부에서 불만이 터져 나왔다.<br><br>“우리가 목숨을 걸고 싸웠는데 돌아오는 것은 반란 의심이냐?”는 불만이 커지기 시작했다. 상군 지도부에는 “이왕 의심받을 것이라면 우리가 일을 저지르자”는 움직임도 있었다.<br><br> ▶의리를 배반하는 유혹은 거부해야 한다<br><br> 상군을 중심으로 한족 세력은 증국번을 황제로 옹립해 ‘한족 왕조 부활’을 계획했다. 증국번의 오른팔 좌종당이 움직였다. 좌종당의 심복 호림옥은 말했다. “우리가 천하를 전부 얻지 않더라도 장강을 사이에 두고 천하를 양분하는 것도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결심만 하시면 우리는 그 뜻을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증국번의 대답은 ‘불가’였다.<br><br>상군 지도부의 야망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증국번의 심복 팽옥린도 권했지만 증국번은 “팽옥린이 나의 충성심을 실험할 수 있는가?”라고 분노하며 팽옥린의 편지를 씹어 버렸다. 이번에는 왕개운이 나섰다. 왕개운은 증국번에게 새로운 국가 건설을 설파했다. 아무 반응 없이 찻잔 물로 탁자에 글씨를 쓰던 증국번이 자리를 비웠다. 왕개운은 증국번이 쓴 글씨를 읽었다. 허망할 ‘망妄’ 자였다. 증국번의 동생 증국전을 비롯해 좌종당, 팽옥린 등 참모 30여 명이 모여 증국번과 마지막 담판을 시도했다. 증국번은 그 자리에 나가지 않고 대신 시 한 구절을 보냈다. 그 시는 ‘내 뜻은 권력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어떤 상황이 와도 나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라는 내용이었다. 상군 지도부도 더는 어쩔 수가 없었다.<br><br>물론 증국번도 청 왕조가 치열한 전투 중에 지원을 끊었던 일 등에 좌절을 느낀 적도 있었다. 당시 ‘전란이 수습되면 증국번이 황제가 될 것’이라는 소문이 전국에 퍼져 있었다. 하지만 증국번은 백성의 충신이 되기로 결심했다. 상군을 조직한 이유가 청나라 왕조의 사직을 지탱하려는 것도 있지만 오랜 전란으로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겠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기 때문이다.<br><br>증국번은 젊은 인재들을 선발해 유학단을 구성했다. 매년 30여 명의 인재들이 국비로 유학을 떠났다. 그는 보수적인 유학자였지만 국가 발전을 위해서는 편향된 사고를 버려야 한다는 실용주의자였다. 증국번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을 정책으로 삼았다. 즉, 중국을 몸체로 하되 서양의 발달된 문물을 이용한다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정책은 서양 문물을 이용해 부국강병을 이루자는 양무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그야말로 두 번의 아편 전쟁, 태평천국의 난 등을 겪으면서 존망의 위기에 처한 청나라로서는 증국번의 개혁이 마지막 등불이었다.<br><br>증국번은 정책이 지속력을 갖기 위해서는 후계 그룹이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가문, 학벌보다 능력이 있는 자를 발탁했다. 그렇게 이홍장, 좌종당 등을 후계자로 양성했고 호림익, 류장우, 이한장, 곽숭도, 심보정 등이 성장했다. 상군 출신으로 순무와 총독에 오른 이가 무려 13명으로 청나라 말기는 증국번의 후예들에 의해 지탱되었다. 증국번은 그들에게 많은 권한을 주고, 그들이 권력을 어떻게 행사하고 민의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지켜보았다. 증국번은 1870년 이홍장에게 직책을 인계하고 은퇴했다. 그리고 1년 뒤 1861년에 62세로 세상을 떠났다. 황제 동치제는 증국번을 태부로 추증하고 ‘문정’이란 시호를 내리면서 1등 후작으로 임명해 그의 충성심과 애국심을 높이 평가했다.<br><br>증국번은 천재 혹은 영웅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근면과 성실로 채웠다. 즉 “남이 열 번하면 나는 천 번, 만 번을 한다”할 정도로 노력파였다. 증국번은 유학의 가르침을 자신에게 적용했다. 그는 스스로를 감시했다. 매일 자신의 언행을 기록하고 그 기록을 통해 반성하고 자책했다. 그러나 그는 경전의 자구에 연연하는 꽉 막힌 인물만은 아니었다. 그는 솔선수범, 청렴, 성실 그리고 진솔한 자세로 모든 사람을 대했다. 지위가 높다고, 돈이 많다고 상대를 대하는 자신의 태도와 마음가짐을 따로 하지 않았다. 이러한 증국번의 한결같은 자세와 마음이 있었기에 그가 지휘한 상군이 최고의 정예 부대가 되었던 것이다.<br><br>그는 항상 경계심을 잃지 않았다.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것을 명확히 구분 지었고, 소신이 서면 어떠한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불의, 관행, 편리와 타협하지 않았다. 그는 정치가나 군사 전략가로서의 명성보다는 ‘하나의 완성된 인간’으로서의 가치에 역점을 두었다. 명재상이었지만 그는 공맹의 도리, 즉 인내와 관용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라보고 행동하는 유학자라는 자긍심이 더 컸던 것이다. <br><br> [글 박기종(커리어 코칭 칼럼니스트) 사진 언스플래시]<br><br> [본 기사는 매일경제 Citylife 제773호 (21.04.06) 기사입니다]<br><br><span class="end_photo_org"><img src="https://imgnews.pstatic.net/image/009/2021/04/06/0004775034_004_20210406105747286.jpg?type=w647" alt="" /></span> <br><br><!-- r_start //--><!-- r_end //--><!-- r_start //--><!-- r_end //--><a href="https://media.naver.com/channel/promotion.nhn?oid=009" target="_blank">▶ '경제 1위' 매일경제, 네이버에서 구독하세요</a><br><a href="https://www.mk.co.kr/premium/series/20121/?utm_source=naver&utm_medium=promotion&utm_campaign=make" target="_blank">▶ 이 제품은 '이렇게 만들죠' 영상으로 만나요</a><br><a href="https://tv.naver.com/mkestatetv" target="_blank">▶ 부동산의 모든것 '매부리TV'가 펼칩니다</a><br><br>[ⓒ 매일경제 & mk.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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